한국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美蘇 국제적 세력분할 구도에서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결정지어지는가. 희망의 20세기. 그러나 전쟁의 20세기.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이 물러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세력 분할의 장이 된다. 스스로 제 운명을 결정할 힘을 가지지 못했던 한반도에 불어온 미소대결이라는
시즌 정보
KBS 특별기획 한국전쟁 시즌 1
10개 회차 · 2010-06-06
전체 회차
서울을 수도로 한 두 개의 정부 수립. 38선을 두고 마주한 남과 북,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1949년, 38선에선 이미 작은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소군의 철수로 남북의 대결 무대가 된 38선. 1949년부터 1년 반 동안 38선 부근에선 무려 750건이 넘는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의 신호였다. 1950년 1월,
폭풍처럼 다가온 50년의 여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암호명 '폭풍'. 한국군은 제대로 방어할 새도 없이 무너졌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암호명 '폭풍'. 한국군은 제대로 방어할 새도 없이 무너졌다. 북한의 기습, 미아리 방어선의 붕괴, 한강교 폭파. 6월 28일 새벽 5시, 인민군의 서울 입
인천방어지구사령부: 북한은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13일,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질풍 같은 북진: 38선을 넘느냐 마느냐의 딜레마에서 압록강 점령까지. D-DAY, 1950년 9월 15일. 작전명 '크로마이트'. 인천상륙작전. 한국전쟁의 새로운 반전이었다. 인천에 상륙한 UN군이 서울을 수
미국은 중국의 참전을 예상했나: 맥아더와 트루먼의 웨이크회담. 소련은 왜 참전 사실을 은폐하려 했는가. 한국전 당시 핵무기 투하에 관한 미극동사령부 문서가 존재한다! 10월 19일. 중국군이 드디어 압록강을 넘었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결정으로 UN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위협을 느낀 중국은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다.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협상, 그러나 전쟁의 망령은 끈질겼다. 휴전협상은 승리의 명분을 찾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이었다. 1951년 6월, 전쟁이 시작된 지 꼭 1년 만에 유엔군과 공산군은 38선 부근에서 다시 만났다. 양측은 더 이상 무력으로는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휴전협상의 신호였다. 협상이 시작되기만
전쟁은 삶을 한순간에 바꿔놓았다. 부모 사랑 듬뿍 받던 아이가 고아가 되었고 농사를 천직이라 여기던 농부는 좌판 상인이 되었다. 피부색이 검고, 흰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남한 정부의 임시수도, 부산.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 밀려드는 피난민들로, 47만이던 부산인구가 순식간에 100만으로 늘어났다.
2년 여 동안의 휴전협상,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서야 전쟁은 끝이 났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했다. 휴전을 서두르지 말라고 지시하던 공산권 최고 통치자의 죽음. 중국과 북한은 이제 그만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다. 공산 측이 먼저 움직였다. 겨우내 교착상태였던 휴전회담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남북 간의 충돌로, 미소 대리전의 양상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쟁의 망령 현재에도 한반도에서만큼은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끝났다. 남과 북은 저마다 제가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38선으로 분단됐던 한반도는 그 이름만 휴전선으로 바뀐 채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겨졌다. 승자도, 패자도 없
냉전 종식 20년. 한반도에 남겨진 과제는 무엇이며 전쟁의 교훈은 무엇인가. 총 사망자 3-4백만. 전 국토의 4분의 3이 초토화된 상태. 그리고 한반도에는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다. 남쪽의 자유민주주의와 북한의 사회주의는 서로 견고하게 벽을 쌓아 서로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러나 1990년 소련의 붕괴 이후 단단한 벽에 균